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르베르 대항거 (문단 편집) === 제국의 서부 === ''' 우마이야 왕조의 마그레브 (이프리키야) 정복 ''' [[1차 피트나]]를 겪으며 중단되었던 서부 진출은 야심만만한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파 무아위야 1세의 의지로 재개되었다. 그의 명을 받은 사령관 우크바 이븐 나피는 670년에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고 병영 도시인 [[카이로완]]을 세웠다. 그는 681년에 대서양 연안까지 진출하였지만 해안 도시들과 내륙의 베르베르인들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였다. 결국 코사일라가 지휘한 베르베르인은 해안 요새에서 농성하던 로마군과 연합하여 아랍 인들의 베후를 공격, 대파하였다. 이븐 나피는 전사하였고 아랍 군대는 마그레브 전체를 포기하며 도주하였다. 683년, 로마 - 베르베르 연합군은 카이로우안까지 함락하며 이슬람 군대를 키레나이카의 바르카로 추방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1차 원정은 기존의 영토까지 상실하는 대실패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아랍 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2차 피트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우마이야 조의 신임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688년과 689년에 걸쳐 마그레브에 2차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카이로우안을 탈환하였으나 동로마 군대에게 후방을 습격당하여 다시 후퇴하였다. 혈기가 넘쳤던 칼리파 알 말리크는 새로운 사령관 핫산 이븐 누만에게 4만 대군을 주어 3차 원정을 지시하였다. (692년) 누만은 현명하게도 로마 측과 베르베르 간의 이간책을 써서 둘을 갈라 놓았고 뇌물을 통해 베르베르 족을 회유하는데 성공하였다. (693년) 이로써 알 누만은 후방의 베르베르인들에 대한 걱정 없이 눈 앞의 로마군만 상대하면 되었다. 게다가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막장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실정으로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하였다. 695년, 소아시아 함대의 반란으로 레온티오스가 새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이미 아랍 군대는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카르타고]] 등 몇몇 해안 도시를 제외한 로마 령 아프리카를 제패한 뒤였다. 698년, 3년여간 지속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카르타고가 함락되며 동로마 제국은 또하나의 주교구이자 대도시를 이슬람 측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후 일부 베르베르인들은 여왕 [[카히나]]의 지도 하에 우마이야 조에 반기를 들었지만 누만에게 진압되었다. 누만이 705년에 사망하자 칼리파 알 말리크는 무사 이븐 누사이르를 이프리키야의 총독으로 파견, 수군 기지와 함선 건조를 명령하였다. 따라서 시리아, 이집트에 이어 아프리키 함대까지 손에 넣은 우마이야 조는 지중해의 해상 패권을 쥐게 된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누사이르는 베르베르인 노예 출신 부장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게 7천 군대를 주어 스페인으로 파견하였다. (711년 4월 말) 그가 서고트 국왕 로데리고를 격파하고 712년까지 세비아와 코르도바 일대를 석권하자, 누사이르도 무어인 부대를 이끌고 참전, 719년까지 반도를 통일하였다. 이슬람 군대는 717년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아키텐, 셉티마니아 일대까지 진격하게 된다.[* 누사이르 본인은 714년에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다. 한편, [[알안달루스]]의 수도는 716년에 세비야에서 코르도바로 옮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